구상과 설계

- 무대예술 중에서  scenography라는 말이 종종 사용되게 되었다. 무대 공간을 희곡의 언어와 배우의 연기, 미술, 조명, 음향 등 다채로운 기호로 구성하여 무대라고 하는 캔버스에 움직이는 회화를 그려나간다. 희곡의 재현형식과는 좀 거리가 있는 느낌이 있지만, 그곳에도 희곡이라고 하는 본질이 상연이라고 하는 장에 드러나서, 이를테면 본질과 현상이라고하는 이원론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의 제작방식을 보고 있으면, 본질과 현상이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 등장하고 있다. 음향과 영상, 텍스트와 배우가 동시에 존재한다. 좀더 말하자면, 공간을 여러 요소로 `설계`했다고 하는 것이다. 적지 않게 희곡이라고 하는 텍스트가 절대적인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은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덤타입은 그렇게 하는 방식에 처음보다 적극적으로 몰두해 왔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고 후루바시 상은 `구성, 연출` 대신, `구상, 설계`라는 말을 사용하여 왔는데, 그 근방의 개념으로부터 들어보고 싶다.

> 코야마다: 덤타입의 경우, 최초에 텍스트를 쓰면, 그것이 기준이 되어 작품을 만들어가는 형태를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았다. 여기에 테이블이 있으면, 모두가 그곳에 각자가 지금 갖고 있는 욕망과 인식을 내놓는 형태로 참가시켜 간다. 그것을 함께 논의해가는 것이 덤타입의 제작방식이다. 최초의 구상 단계에서 연출가도 스텝도 없다. 어쨌든 모두에게 함께 구상을 시작해나가는 동안에 떨어져나가는 부분은 떨어져나가고, 남는 부분은 남게 되는 것이다.

텍스트도 퍼포머도 그 이외 여러 가지의 장치라든가 조명도 위계에 있어서는 동등하다. 다만 현실문제에 있어 극장에 들어갈 때는 이런저런 부분과 전문성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어서 그런 단계에서 처음으로 각각의 역할이 생겨난다. 현장에서는 최종적으로 후루바시가 연출이라고 불렀던 입장을 도입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도 전체 안에 있는 일원이다.

- 그렇다면, 무대 위에서 위계가 생기면, 여러 요소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집단의 존재 방식과도 밀접하게 관계가 있게 된다는 것이군요. 그런 확인이 만들어진 데 기반해서 모두가 아이디어와 소재를 낸다. 구체적으로는 그것을 설계해나갈 때, 어떤 벡터가 생겨나는지요?

> 코야마다: 그런 백터에 관해서는, 이것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지요. 누가 정리한다고 말할 수 없고, 그런 경우에 우연이 작용할 지도 말할 수 없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는 전원이 구상하고, 설계하고 정말로 대등한 관계입니다. `구성, 설계`라고 하는 말도 우리가 무리는  , 영어로 하면 conceptual planning개념적 기획이 됩니다. 따라서 개념을 테이블 위에 쌓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작품`을 향해가는 것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서부터 구체화까지는 확실히 시행착오의 연속입니다.


시선의 다원성
- Pleasure Life (88년)과 PH(90년), S/N (93/94년)은 각각 공간의 구성이 독특했습니다. Pleasure Life에서는 무대 위에 설치되었던 설치가 멋져서, 그것의 틈을 퍼포머들이 헤엄치는 것처럼 춤췄다. PH는 객석이 위쪽에 만들어져 있어서 퍼포먼스를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움직임과 기계의 흐름이 상대적으로 보였는데, 문명비판적인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S/N에서는 무대위에 거대한 스크린이라고나 할까, 벽이 솟아 있어서 그 칸막이의 질감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작품을 만들 때, 공간을 어떻게 구성할까는 미리 생각할 수 있습니까?

> 코야마다: 먼저 처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관객의 시선이라는 것이지요. 극장공간을 사용하여 퍼포먼스를 할 때에 비판적이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만약 어떤 시각적 공간을 만들었다고 해도, ____ 공간이라고, 시선은 어떻게 해도 한 방향이 된다. 그것을 어떻게 바꿔갈 것인가. 거기서 `관찰한다`든가, `올려본다` `내려본다` 라고 하는 것들을 객석을 포함하는 공간으로 생각하게 된다.

- 무대와 객석을 마주대하는 근대 극장의 공간과 밝게 달라진 퍼포먼스 공간을 덤타입은 지향해가고 있는 것이군요.

> 코야마다: 그 후에, 영상을 이용하는 처음부터, 물리적인 시선의 방향뿐만 아니라, 이미지를 환기하는 요소의 다원성이라고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됩니다. 예를 들어 S/N에서는 비춰지는 영상과 그곳에서 투사되는 말이 다층적인 이미지를 환기해 나갔다. 관객의 머리 속에는 이미지와 말이 평행적으로 소용돌이치게 됩니다.

- 관객은 둘 이상의 움직임을 하나의 공간 안에서 보게 되는 것이군요. 그것을 어떻게 편집해가느냐, 그 편집능력이 시험되어가겠군요.

> 코야마다: 여러가지 다른 요소들이 왔다갔다하면서 흔들리는 동안에 생각해간다. 이것은 인간 사고의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극장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면, 일방적으로 강제, 고정화되어 간다. 가장 그러한 고정화가 기대되었던 시대도 있었고, 프로파간다를 당하는 것에서 쾌감을 찾아내는 시기도 있었지요. 최근에는 소비의 시스템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콘트롤당하기 쉽다.

- 무대의 위에는 살아있는 배우에게 스토로브가 비춰진다든가, 영상과 조명이 교차하여 많은 요소를 관객은 단편적으로 보고있다. 보통이라면, 그런 과잉에 관객은 당연히 혼란스러워 하겠지만, 하나의 테두리 안에 끼워서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배제하고, 보고싶은 이미지만을 특화해간다. 그것이 보는 것의 제도성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혼란을 키우려는 것입니까?

> 코야마다: 그것을 (파괴라든가 혼란이라든가) 드러내 가는 것이 아니라, 세밀하게 다른 것을 흩으려뜨려 끼워넣는 사이에 있는 종의 통일감을 가져다 마무리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방대해지는 것이죠. 시간이 없는데 그것을 하려면 어떻게 해도 절대적인 한 사람의 독재자 를 만들지 않을 수 없다. 덤타입의 경우, 15 명 정도의 멤버가 한달 동안 공동생활을 해가면서, 무언가 하나의 거대한 `인격`이 만들어진다. 거기서의 시행착오, 서로의 감상의 공유?가 작품의 통일감을 간신히 보장한다고 생각한다.

- 그러면, 코야마다상의 인격이라든가,      상와 후지모토 상의 인격 등이 녹아서 커다란 스프 안에 하나 정도가 되어간다.

    > 코야마다: 그때, 누가 Initiative를 쥐고 있느냐에 따라 매회 조금씩 양념이 변화해갑니다.

- Initiative와 독재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합니다만...

> 코야마다: 그런 독재를 발동시키지 않는 것을 각자가 겨드랑이에 페로몬 처럼 숨기고 있죠? 그것이 지금까지의 아트스케이프 등 다른 운동체와의 교류와 경험으로부터 획득하여 훈련해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외부로부터 새로운 퍼포머가 들어왔을 때, 지금까지의 규칙이 망가지고 마는 경우가 있다. 우리도 괴롭고, 본인도 괴롭다. 반대로, 충돌이 없는 관계는 재미가 없다고 하는 측면도 있다. 다만 그곳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방식을 굽히지 않는 사람은 덤타입으로부터 나가버리는 것이죠. 자기를 좋은 의미로 변화시켜가는 사람, 혹은 변화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남게 된다. `완성된 사람`에게는 맞지 않겠죠. 공통의 목표라든가, 세계관의 공유라고 하는 것도, 그런 것은 매일매일의 마음이 통하는 동안에만 확실해지는 것이니까.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라고 하는 소거법과 같은 벡터는 생각할 수 없다.

- 위계질서를 만들지 않는 집단의 구성이 퍼포먼스를 구성하는 요소의 다원성과 동시존재를 불러모으고 있는 것이군요. 그러면 제작환경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제작 환경에 대해서

>코야마다: 전국적으로 극장은 많이 나타나고 있지만, 제작하는 공간, 스튜디오가 압도적으로 적지요. 우리의 경우, 기재를 갖고 리허설이 가능한 공간이 아니면 소용이 없는데, 그렇게 보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있지만, 제작할 공간은 일본에 없습니다. 최근작인 OR의 경우는 처음부터 극장을 제법 오랫동안 빌려서 공간을 사용하는 실험을 하면서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프랑스의 모브쥬라고 하는 작은 동네에 한달간 음향기재도 영상 기재도 갖고 다녔지만, 테크놀로지의 발달때문에 그 장소에서 편집을 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은 꽤 큰일이었다. 어쨌든 작업을 하면서, 편집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여기까지도 일단 프로그램을 해버린 것이지 그것에 현장이 맞춰진 경우는 없었다. 그것이 매번 실험하는 동안 미세하게 조정되어 완성할 수 있었다. 결국 상연하는 극장이 바로 스튜디오로도 된 것입니다.

- 일본에 비해서, 대단히 사치스러운 제작환경이군요.

 > 코야마다: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24시간 계속 사용했습니다.

- 관리인은 없었습니까?

> 코야마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축제의 소품담당이어서, 그도 아티스트입니다. 그는 우리들과 동시대의 작업에 흥미가 있어서 최종적으로는 열쇠를 우리에게 맡기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 그런 와중에 뭔가 새로운 발상은 나왔는지요?

> 코야마다: 협업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대화를 하는 와중에 처음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지의 스텝 등도 포함해서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해간다. 페이퍼워크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불가능한 일들이,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면서,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솔직히, 하고싶은 일을 하나하나 언어화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효과를 노리고 싶어도, 그것에는 이렇다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지금까지 무리하면서 언어화했던 것들이 필요없어진다.  실제음을 내보면, 어떤 효과가 있는지를 그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화할 수 없는 감각을 시험해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 쪽 방향으로 너무 치우친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 OR이라고 하는 작품에서는 소리가 일상적이지 않게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네요. 지금까지 덤타입도 오리지널 곡을 사용하는 등, 소리에 관계해서는 독자적 시선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이번은 특히 비중이 커졌다고 생각합니다.

> 코야마다: 소리를 시각화하는 공간을 설정한 느낌입니다.

- 내부공간에 들어가 있으면, 중추신경에 호소하는 것을 의도한 것이네요. 소리에 따라 몸이 진동해간다.

> 코야마다: OR은 있는 의미로 압축적인 작품으로, 투어를 하기에 쉽도록 만들어진 측면도 있다.

- 덤타입의 활동이라는 것은 2년이나 3년에 새 작품 하나 정도를 만드는 페이스로 진행되어 왔습니다만, 하나를 만들 때, 월드 투어가 관례로 되어있군요. 일본에서는 이런 페이스로 하는 것이       와 덤타입 정도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주변은 어떻습니까?

> 코야마다:         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힘들지요. 다만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는 과정 투어 루트가 있어서, 뭔가 자금의 회수는 가능합니다. 로베르 르파쥬와 라라라 휴먼스텝스 등과는 자주 마주칩니다. 최근은 테크놀로지계의 페스티발이 늘고 있어서 전시회 안에서 덤타입의 공연을 특별히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장르로부터의 참가

- 월드 투어 중에 20대, 30대의 아티스트들과 만나게 되지 않습니까?

> 코야마다: 퍼포밍 아트에서는 아직 만난 적이 없지만, 영상과 미술을 접목한 것이라든가, 음악세계로부터는 단편적으로 재미있는 것들이 나오고 있지요. 어떤 장르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메인스트림의 안에서는 나오지 않죠. 오히려 곁길로부터       하고 나오지 않습니까. 음악을 하고 있던 사람이 댄스를 한다든가, 미술 안에서 퍼포밍 아트를 하는 사람이 나온다든가. 환경에 변화가 일어나면, 서있는 곳과는 다른 곳에서부터 개구쟁이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그런 데에 우리도 흥미가 있고, 상황의 첨단에 설 수 있게 되는 것도 재미있다. 더불어, 그곳에서 관객수가 있을까라고 하는, 아직 그렇지 않지 않나...

- 멀티 미디어와 혼합 매체라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만, 퍼포먼스의 핵심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60년대의 그것이 `육체`라고 하는 표현이 말해져왔습니다만, 몸의 배우의 육체는 실은 꽤 테크놀로지가 들어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육체`가 정말로 미디어가 되어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여러가지를 연계하게 되었다. 지금 `육체` 또는 `신체`라고 하는 것도 많이 바뀌어가고 있어서, 희박해지지 않았습니까?

> 코야마다: 희박해졌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는 흐름도 나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60년대의 육체는 개인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었고, 여러가지 시스템이라든가 의미 등에 전환되어가는 `거대한 육체`를 출현시켰다. 하지만 현재의 신체는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면, 거대화는 매우 쉽게 가능하다. 개인의 이미지를 일억명에게 이르게 하는 것은 간단해졌다. 그런 속도로 반대로 희박함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개인의 육체가 사회와 연결되지 않는 상태, 그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특수한 육체라고 하는 것이 갈망되어 가고 - 사실은 항상 존재해왔지만 - 그것이 표현의 전면에 드러난다.

- 그런 것입니까.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보다 밝게 하는 것으로써, 60년대의 육체가 있었다. 기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육체군요. 그것에 대해서 현재에는 사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육체가 있다. 사실로써의, 존재하는 단편으로써의 육체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을 결합시켜도 결정되는 사회와 국가라고 하는 것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을 예술이 발견해가고 있다.

> 코야마다: 그런 기분이 듭니다. 사회라고 하는 이야기, 국가라고 하는 이야기에는 성립할 수 없는 육체겠죠. 다만 사회가 희박하게 되어가는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하루가 끝나도, 손톱에 때가 생기고 말죠. 그것을 보고 있으면, `사회 안의 희박함`가 아닌 자신이 갖고 있는 리얼함, 그것이 구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치와 사회, 그리고 기호적인 것에는 없는 자신의 신체인 것이죠. 얼마나 미디어가 정보를 소통시켜도 개인의 신체는 절대로 길들일 수 없다. 그런 손톱의 때를 보면서 원가를 생각한다. 기호적인 60년대의 신체와는 질이 다르다.

- 곧, 희박한 신체에는 강도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퍼포밍 아트에 대해서는 여전히 `임팩트`라든가, `극적`으로 있는 힘이 있다. 이것은 몇천년이라고 하는 보는 것의 역사, 그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신 얻은 가치관을 가질 것인가.

> 코야마다: 그것에 대해서는 꼼짝하지 않고 있다. 80년대까지라면, 아직 전략을 세우는 것에 의미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절망하고 있다. 솔직히 애쓰고 있는것은 아니지만. 퍼포밍 아트와 연극적 공간의 활동만으로는 형편이 안된다. 다른 사람과 만나는 일을 통해 들어오는 욕망의 방향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고 하겠네요.


공공 공간에 대해

> 코야마다: 나에게 있어 공간이라는 것은 뭐래도 극장과 무대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이 사무실이 있는 빌딩도 공간이다. 이 생활 공간을 어떻게 예술로 포착할것인가. 오히려 시각적 공간을 조형한다는 것보다 그 입장의 개인적인 것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가능하다면 공공이라고 하는 것으로 연결시킬 것이냐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때의 공공 공간이라는 것은 어던 이미지로 포착하고 있습니까?

> 코야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공공 공간이라면, 하지만 그것은 많은 경우 사용되고 있는 것이죠. 확실히 현재의 시민사회에는 개인으로 획득할 수 있는 공공공간은 별로 없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공공공간은 여러 얼굴을 하고 있는 공간이 많이 존재하고 있어서 총체적으로 공공공간이라고 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이 덤타입의 사무실은 공유된 사무실이지만, 1년을 통하여 100명 정도의 사람이 출입하고 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있는 것이 반 정도이고, 공공적으로도 존재합니다. 만약 그러한 성질의 것이 이 교토 시내에 200개 정도 있어서, 그것을 이어주는 것이 나타나면, 그 틈에서 가능해지는 것이 공공공간이 아닐까요. 개인적인 공간은 미니멀한 채로, 그것이 여러가지 활동 - 홈파티라도 좋지만 - 을 시작해 간다면, 그것이 공공적인 공간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공간성의 범위 같은 것이, 극장이라든가 아트센터와는 다른 공적 공간과 연계되어 가면, 자연스럽게 공간의 사용 방식이라든가 활동의 방식이 바뀌어 갑니다. 그것이 잘 되면, 행정이 만든 공간은 적어져도 좋다. 행정은 그것을 후원해주는 것이 좋다.

- 이런 덤타입, 사무실과 같은 공공 공간이 머지않아 공공공간으로 되어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군요.

> 코야마다: 먼저 그럴 때, 복수가 아니면 소용없습니다. 하나의 공간만이 행정으로부터 자금을 제공받으면, 기존의 불공평함이 생겨버린다. 홀로 그렇게 다원적으로 있는 것은 무리니까. 여러 종류의 것들이 존재해서, 같은 활동이 이어지면 균형이 어떻게든 상호적으로 잘 된다. 사실은 무정부주의적인 것이 좀더 번식하지 않으면 공공은 생겨나지 않는다. 개인적인 것 안에서 공공이 있고, 공공 안에 개인적인 것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 지금까지 코야마다상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시각적 공간이라고 하는 무대에서 집약될 수 없는 범위를 느낍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무대공간을 좁은 이미지 안에 가두어버리고 만 경향이 있다. 집단의 상태, 자유롭게 무정부주의적인 사람들의 결합이 실제로는 개방된 장과 공간을 만들어간다. 무대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반영인 것이죠. 소극장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이것은 단순한 용기로서의 소극장과 무정부주의적인 사람들의 결합의 장으로써의 소극장(단)의 이중의 이미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의 집단의 상태에는 돌아가버렸다. 이 역학관계를 열면서 오늘, 환기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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