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페이스의 황당한 연대기 10:
기이한 인터페이스들의 복마전伏魔殿


필립스와 소니: 커뮤니케이션의 황홀경

 

오늘날 디자인계의 화두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다. 이에 따라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지형도 안에서 새로운 디자인의 윤곽을 그려보고자 하는 시도들이 거듭되고 있다. 이런 시도들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최신 전자제품의 흐름을 주도하는 초국적 기업들의 움직임이다. 이들은 디자인을 방파제로 삼아 거칠게 휘몰아치는 테크놀로지의 격랑을 약화시키면서, 가까운 미래에 시장의 헤게모니를 장악할 새로운 제품의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유비쿼터스 컴퓨팅과 엠비언트 테크놀로지를 근간으로 사라짐의 미학을 선보인 필립스사의 최근 디자인 프로젝트 <The New Everywhere>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이 프로젝트는 "보이지 않는 컴퓨터"라는 도널드 노먼Donald Norman의 시나리오에 기대서, 1998년의 <미래의 비전Vision of the Future> 프로젝트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필립스 디자인의 총책임자, 스테파노 마르자노Stefano Marzano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미래 가정의 모습이 오늘날의 가정보다 과거의 가정에 좀더 가까우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가정을 채우고 있는 블랙박스들은 이제 사라질 것이며, 의자, 탁자, 침대와 같이 좀 더 오랜 역사를 버텨온 사물들이 무대 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물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특정한 형태로 우리와 함께 생활해 왔으며, 그 기능은 나름의 본질적인 형식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블랙박스의 사물들이 수행하는 기능(엔터테인먼트, 커뮤니케이션, 노동)은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최종적 형태는 아직 성취되지 못했다. 그것들은 좀 더 중요한 사물들, 즉 벽, 책장, 의자, 접시와 같은 사물들과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다."


요컨대 가전제품들이 블랙박스를 벗어 던지고 가구-오브제나 스크린의 얼굴을 한 채 가정 공간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필립스만이 아니다. 소니 본사의 사장인 쿠니타케 안도는 자신이 원하는 자사의 미래상이 하드웨어와 엔터테인먼트를 그저 팔기만 하는 기업이 아니라 그것들을 홈 네트워크의 일부인 제품들에 디지털 포맷으로 전송하는 기업이라고 말한다. 소비자의 감탄을 자아내는 혁신적인 하드웨어 생산 업체로서의 소니와 세계 7대 미디어 기업으로서의 소니. 하드웨어와 엔터테인먼트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비즈니스 모델이 소니의 새로운 전략이다. 안도와 같은 맥락에서 소니 회장 이데이 노부유키 역시 소니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사의 제품들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며 소니가 미래에 팔게 될 눈에 띄는 하드웨어는 스크린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필립스와 소니, 양자의 디자인 전략이 취하는 공통분모는 플라스틱 블랙박스로부터 탈피한 정보 가전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물론 차이도 있다. 필립스의 전략이 정보 가전의 오브제화를 추구한다면, 소니의 전략은 디지털 콘텐츠의 소비 채널로서 스크린을 주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자 제품의 블랙박스가 사라지는 지점에서 디자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디자인이 그동안 스스로의 입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해왔던 주장들을 살펴보면, 디자인의 위상이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디자인은 언제나 상품의 경제적 부가 가치를 증대하는 요소라고 스스로를 선전해왔다. 그러나 부가가치란 근본적으로 경쟁 상대가 지니지 못하는 어떤 것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즉 디자인의 부가가치란, 풍부한 문화적 자산과 전통으로 세계 시장을 무대로 유행을 선도하거나, 첨단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려 신제품을 개발할 때 발생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디자인이 디지털 경제 체제에서 부가가치의 확대 재생산 기제로 자리 잡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전통적인 제품들의 영역에서 이탈리아의 명품 패션 브랜드들과 어깨를 겨루거나 그 수준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이 경우, 필립스사의 컨셉트 제품들이 보여주듯, 디자인은 근본적으로 유행의 트랜드세터trend-setter로서 패션화될 수밖에 없다.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이 상대적으로 짧은 각종 휴대용 정보 기기들이 첫 대상이 되겠지요. 실제로 최근 애플의 아이포드i-Pod은 구찌나 프라다의 액세서리로 제 몸을 치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애플과 프라다가 손잡고 웨어러블 패션 컴퓨터를 선보이는 것도 시간문제일 듯 하다. 한편, 물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물보다는 네트워크와 접속된 스크린 내부의 공간에 좀 더 비중을 두는 것도 하나의 방편일 것이다. 소니의 사례가 보여주듯, 셋톱박스의 스크린에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정보 콘텐츠야말로 최상의 '부가 가치'를 뽑아내는 상품이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들이 상정하는 미래란 모든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정보 통신 기기-휴대용이든 붙박이이든-로 정보 콘텐츠를 서핑하며 다른 사람들을 호출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세계이다. 사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런 유토피아의 기원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은 곳에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아이들의 비명 대신 웃음소리를 회사의 에너지원으로 바꾸기로 결정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몬스터 주식회사>와 같은 디즈니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단지, 행복을 소비하라는 정언 명령이 커뮤니케이션의 황홀경을 경험하라는 지상 과제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 때의 황홀경은, 이를테면, 길에서 주어온 귀여운 강아지를 자동으로 수온이 조절되는 욕탕의 온수로 목욕시키고 빌트인 영상 커뮤니케이션 장비로 그 주인을 찾아주는데서 느끼는 그런 행복과 묘한 짝을 이루고 있다. 스크린 위로 전송된 아이와 동물의 방긋방긋 웃는 표정에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려는 이 기이한 나르시시즘, 그것은 해피엔딩의 유토피아에서 커뮤니케이션의 테크노피아로 거듭 세습되어온 옹골찬 심리적 기제인 듯 보인다.


홍승표의 <가면 시민 X>
그런데 과연 커뮤니케이션의 테크노피아야말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속도를 뒤쫓을 수 있는 디자인의 유일한 패러다임인 것일까? 위악의 거친 시선으로 보면 한없이 가식적인 행복의 표정은, 혹시 무리한 성형 시술로 안면근육의 자율 반응 기능을 상실한 디자인의 무표정이 아닐까? 정말로 초국적 기업들이 내놓은 일방통행식의 시장 전략 시나리오만이 디자인의 미래인 것일까?


한번쯤 주류 디자인계의 흐름과는 거리를 둔 채 도발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디자인들을 살펴보면 어떨까? 실제로 커뮤니케이션의 테크노피아에 대한 거부 반응을 담고 있는 실험적인 디자인들이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꾸준히 제안되고 있다. 먼저 개인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다루는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홍승표의 <가면 시민 X>와 크리스핀 존스Crispin Jones의 <소셜 모바일Social Mobile>이 그것이다. IDEO와 ECCO 디자인에서 일한 바 있는 홍승표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디자인의 집착에 의문을 표시한다. 정말로 우리가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갈망하고 있는 것일까? 월말마다 꼬박꼬박 날라 오는 각종 정보 통신 관련 납부 고지서의 압박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무수한 커뮤니케이션의 채널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외와 단절을 무마해줄 수 있을까?


물론 늦은 밤, 전화 통화로 친한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은 하루 종일 시달린 심신의 피로를 단번에 날려보낼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전부 그와 같을 수는 없다. 이제는 멸종 위기에 처해진 소수만의 처지인지는 모르지만 오지랖이 넓지 못해 대인 관계에 무기력한 사람들도 있고, 바쁘게 움직이는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혼자만의 공간에서 한숨을 돌리길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이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의 전자파가 사방팔방으로 노출된 공간은 그 자체로 신경증을 유발하는 두려움의 대상일 것이다. 인터넷을 끊고 휴대폰을 끄고 방문을 잠그면 될 것 아니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다. 요컨대 잠수를 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연락을 취하고자 하는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줄 수 있다. 직장 상사라면 사직서를 요구할 것이며, 지도 교수라면 인생 포기한 놈이라고 끝없는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이며, 부모님이라면 긴 한숨으로 자식의 미래를 근심하실 것이다. 그냥 이런 상황을 방조하고 말 것인가?


<가면 시민 X>는 이에 대한 해결안을 제공해준다. 잠수를 타긴 타되, 일상의 점유지를 이탈하지 않으면서 대인 관계의 표면 위에서만 잠수를 타는 것이다. 이는 가면을 뒤집어쓴 채 묵언 수행을 행하면서도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의 <가면 시민 X>는 문자 그대로, "무쇠처럼 두꺼운 낯가죽"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지닌 철면피鐵面皮이다. 단어의 용례 상 뻔뻔스럽고 후안무치하다는 의미가 연상되기도 합니다만, 홍승표의 철면피는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면서 잠수를 타는 방법을 제안한다.


이런 류의 제안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스웨덴 출신 디자이너 제니 피네우스Jennie Pineus의 <코쿤체어Cocoonchair>과 <헤드코쿤Head-cocoons>는 그렇다. <코쿤체어>는 간단한 천막 장치를 부착한 이동형 의자로, 공항, 사무실, 도서관 등 공공장소에서 개인적으로 편히 쉬거나 독서를 하거나 낮잠을 자고자 할 때 사용할 수 있다. 한편 <헤드코쿤>은 <코쿤체어>의 포터블 버전으로 어느 장소에서든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사용하지 않을 경우 접어서 전용 가방에 집어넣고 다닐 수도 있다. 다분히 ‘봉투 시민 X'로 불릴만하다. 한편 제니 피네우스의 작품들의 경우, 다분히 아날로그적 방법으로 공간의 완전 밀폐를 추구하는데 반해, <가면 시민 X>는 이모티콘과 같은 간단한 표정 연출로 최소한의 대화 채널을 유지한다는 차이도 있다. <가면 시민 X>의 스타일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건담 시리즈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크리스핀 존스의 <소셜 모바일>
한편, IDEO의 지원을 받은 크리스핀 존스의 <소셜 모바일>(이하 <소모>)은 다소 공세적인 자세를 취하며, 휴대폰이라는 새로운 발명품의 사회문화적 측면, 특히 공공장소에서의 휴대폰의 사용을 문제 삼는다. 최신 모델을 선보이는데 급급한 휴대폰 디자이너들이 무관심으로 방치 해버린 부분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다. 이제는 극장이나 강의실 같은 공공장소에서 휴대폰을 꺼놓거나 진동 모드로 해 놓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 되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기차나 지하철, 고속버스에서 휴대폰 대화는 당연한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 기차의 뒷자리 좌석에 앉은 승객이 끝없이 휴대폰으로 수다를 떠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가까이에서 다소 딱딱한 전자음으로 최신 유행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신경과민 증세가 도지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 통화를 해대는 불한당들에게 주변 사람들은 일종의 투명인간들일 뿐이다. 무시해도 그만인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나 소모 시리즈 중 하나인 <새총 모바일catapult mobile>은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킨다. 그것은, 불시에 휴대폰을 꺼내들고선 인내력의 임계점을 시험하는 익명의 불청객들에게 우리 자신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준다. 휴대폰으로 시끄럽게 통화하는 이들을 조준한 뒤 휴대폰에 부착된 새총을 잡아당기면 된다. 그러면 휴대폰에서‘조용히 통화하라’라는 메세지가 험악한 목소리로 터져 나온다.


반면, <스피킹 모바일speaking mobile>는 공공장소에 있는 사용자가 주변의 상황을 고려해 말을 하지 않고도 상대방과 통화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사용자가 소리 내서 말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특정한 사운드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또한 <뮤지컬 모바일>은 사용자가 피리를 불면서 전화번호를 누르도록 디자인되었다. 전화를 걸려면, 피리에서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이 휴대폰의 사용자는 어쩔 수 없이 주변 주변의 이목을 살필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눈치를 준다면, 전화 통화를 잠시 미뤄야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이 디자인 제안들이 다루고 있는 문제의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소모의 디자이너는 이를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존스는 무미건조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대신 감성적인 인터랙션을 행하는 것이 전화 통화의 친밀함을 한층 북돋아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름대로 타당성 있는 이야기지만, 여기에서 주목해봐야 할 점은 이 같은 디자이너의 의도가 향하는 방향입니다. 일단 <소모>는 일반적인 휴대폰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드는 것은 휴대폰의 인터페이스에 있다. 만약 문자 메시지를 전송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다면, <소모>의 인터페이스는 기존 휴대폰의 상투화된 모습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나무를 재료로 사용하거나 의도적으로 둔탁한 형태를 선택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소모>의 시각적 외양보다는 그 독특한 인터랙션 기능에 주목하게끔 만든다. 이런 식의 접근법은 <스피킹 모바일>에서 두드러진다. 이 휴대폰에서 LED 스크린과 버튼형 인터페이스를 대신해 정중앙에 떠억 하니 버티고 있는 것은, 테크노 DJ가 턴테이블 위의 LP 음반을 스크래칭하는 믹싱 장치와 흡사한 조이 스틱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인터페이스 덕분에 <소모>의 형태는 무척 단순하다. 실제로 피리 모양을 그대로 흉내 낸 <뮤지컬 모바일> 이외의 다른 휴대폰들의 스타일은, 마리오 벨리니Mario Bellini가 1972년에 디자인한 올리베티 사의 전자계산기, 디비쥬마Divisumma 18를 연상시킬 정도로 미니멀하다.


각종 사용성 평가 기법에 익숙한 냉정한 인터페이스 디자이너의 눈으로 보자면, 이 디자인들을 반-사용자 친화적인 것으로 지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휴대폰의 버튼 하나 잘못 누른다고 해서 핵미사일이 잘못 발사된다거나 지하철이 탈선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그 정도의 농담은 오히려 디자인의 상상력에 역동성을 불어넣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뒤집어 보자면, 인터페이스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속도전의 멘탈리티가 오히려 일반 사용자를 낯선 기계의 인터페이스 앞에서 쉽게 조바심을 치도록 길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사용자의 범위를 그저 "버튼을 누르는 사람"으로 추상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앞서 이야기했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의 디자인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용성 평가의 통계 수치와는 전혀 무관했으며 오히려 인간의 인지 과정에 대한 풍부한 인문학적 이해에 디자인의 상상력이 더해진 결과였으니 말이다. 지금과 같은 과도기에 디자인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적 통찰력에 근거한 상상력이 아닐까?


피터 앨런과 칼라 머레이의 <스킨테틱>
<가면 시민 X>가 사람과의 인터페이스를, <소셜 모바일>이 정보기기의 인터페이스를 다루고 있다면, 크랙브룩 아카데미 출신, 피터 앨런Peter Allen과 칼라 머레이Carla Murrary의 <스킨테틱Skinthetic>은 브랜드와의 인터페이스를 문제 삼는다. 최근에 들어 브랜드 전략은 기업의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극대화해주는 디자인 전략의 일환으로 크게 부각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있어 왔습니다. <First Thing First>라는 선언문을 발표한 유명 그래픽 디자이너들, 국내에서도 대규모 전시를 연 영국의 조나단 반브룩 등이 캐나다의 미디어 재단 <애드버스터즈Adbusters>를 구심점으로 삼아 초국적 기업의 브랜드 전략에 대해 꽤나 비판적인 활동을 해왔다. 이들의 공통점은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의 <노 로고No Logo>를 성경처럼 읽고 그 책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방식은 20세기 초반의 유럽 좌파 예술가들이 행한 반파시즘 프로퍼갠더의 시각적 어법으로부터 그리 멀리 벗어나 있지 않다.


피터 앨런과 칼라 머레이는 이들에 비해 약간 모호하게 판단 정지의 태도를 견지한다. 이들은 2020년이라는 시점에 맞춰 거대 기업의 브랜드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현재에는 의류나 제품에 적용되는 수준의 브랜드 이미지가 유전 공학이나 성형외과 기술과 결합될 가능성을 예측한다. 이들이 사례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마스터카드, 나이키, 샤넬 등 세 가지 브랜드이다. 이들이 제안하는 마스터카드와 나이키의 디자인 컨셉은 우리가 사이버펑크 소설에서 보아온 미래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플라스틱 신용 카드를 디지털 DNA로 대체하고 이를 손톱에 이식한다거나, 충격완화를 위한 공기펌프를 발바닥에 이식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샤넬 브랜드의 사례 연구는 훨씬 급진적이다. 이 경우,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샤넬과 같은 명품 브랜드에 집중되는 욕망의 흐름이다. 기본적으로 자본의 흐름은 욕망의 흐름이고, 욕망의 흐름은 우리의 몸을 타고 흐른다. 백화점으로, 면세점으로, 쇼핑에 나선 우리들은 욕망의 엑스레이로 정기 검진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욕망에 호명된 소비의 주체는 상품의 쇼핑에만 멈추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20세기 후반에 새롭게 출현한 신체 이형 장애라는 성형 수술 중독증에 시달리기도 하지요. 텔레비전 브라운관으로 전송된 거의 모든 미녀들의 얼굴은 외과의의 메스가 남긴 상처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니 이런 질문도 가능해 보인다. 유명 여배우들이 들고 다니는 명품 핸드백을 신용카드로 살 수 있다면, 그 여배우의 코를 구입할 수 없는 것일까? 더 나아가, 외과 시술을 받는 김에 구찌나 프라다의 로고를 피부 조직에 이식받아 "명품"의 몸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언젠가 영국의 문화 이론가, 딕 헵디지는 영국 노동자 계급 출신의 펑크족 청년에게 어깨에 독일 나치의 '브랜드 로고'인 철십자 문양을 문신한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그 청년의 대답은 간결하고 단호했다. “기성세대로부터 증오 받기 위해서!” 그 청년은 나치의 이데올로기 따위는 전혀 괘념치 않고 그저 기성세대가 역겨워하며 불쾌감을 느낄 법한 문양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신체를 도화지 삼아 낙서를 하면서 거기에 직설적인 반항의 의미가 새겨 놓았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일견 <스킨테틱>은 부러움으로 가득 찬 타인들의 시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순순히 브랜드 이미지를 활용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디자인에서 브랜드라는 기호는 순조롭게 쾌락의 의미망에 가닿지 못한다. 이 디자이너들은 신체 이형 장애와 브랜드 중독증이라는 포스트모던 문화적 병리 현상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해 기이한 질감의 브랜드 이미지를 연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펑크족의 전략이 기호학적 게릴라전에 가깝다면, 이들의 디자인은 시각적 충격을 동반한 하드코어hardcore 스펙터클에 가깝다고 할까? 과다 출혈에 시달리면서도, 드높은 욕망의 파고 위로 서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신체 상해의 이미지,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데이비드 핀처가 감독한 척 팔라닉 원작의 영화 <파이트 클럽>의 정서와 묘하게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MVRDV의 <돼지 도시>
앞선 사례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천방지축으로 치고 빠지며 어수선한 난장을 만들어 보인다면, 네덜란드의 젊은 건축가 그룹, MVRDV의 <돼지 도시>는 도구적인 합리성의 잣대를 사용해 기이한 넌센스의 도시 경관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네덜란드 농림부가 발주한 돼지 농장의 설계안에 변칙 스타일로 승부를 건다. 자못 심각한 문제의식으로 들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자.


"2000년 총 소비량이 800 억 킬로그램인 돼지고기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고기 중 하나이다. 최근 돼지 콜레라와 아구창鵝口瘡은 양돈 산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다. 이대로라면, 양돈 산업은 많은 인명 피해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두 가지 대비책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는 우리가 식습관을 변화시켜 즉각 채식주의자로 변모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생태적인 방향으로 육류 생산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MVRDV는 후자의 방안을 택한다. 그들이 보기에 돼지들이 앓고 있는 질병의 상당 부분은 돼지들이 사육되는 비좁고 지저분한 환경, 그리고 산업 부산물과 자연 곡물을 50대 50으로 섞은 사료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돼지 사육을 위한 쾌적한 공간을 마련하고 자연 곡물 사료를 도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1999년의 통계에 따르면, 네덜란드에는 1520만의 돼지와 1550만 인간이 살고 있으며, 사료 생산에 필요한 공간까지 합쳐 현재 한 마리의 돼지를 기르는데 664 평방미터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따라서 유기 사료를 생산하고 돼지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려면, 훨씬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이들의 계산법에 의하면 네덜란드 전국토의 75퍼센트가 돼지들의 차지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디자인 해결안은 무엇일까? 어처구니없게도 MVRDV는 돼지를 위한 고층빌딩 도시의 건설을 제안한다. 이들은 과도한 합리적 추론으로 모더니스트들이 상상했을 법한 거대한 기계 도시를 제안하며 그 도시의 주인을 인간이 아니라 돼지로 상정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이 집단의 주축, 비니 마스는  "돼지들도 즐겁게 살고 행복하게 죽을 권리가 있지 않을까요, 스트레스 없이 자란 돼지가 우리 몸에도 좋겠지요"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디자인 안은 꽤나 치밀하다. 돼지 사육과 곡물 재배에 필요한 공간을 고층 빌딩으로 해결하고, 그 공간 안에서 돼지들이 자연스럽게 노닐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여기에 사료 생산 공장과 도축 가공 공장의 생산라인을 통합해 하나의 거대 시스템을 구축한다.


이것이 CG로 처리된 그저 그런 SF 영화의 배경 무대로 치부한다면, 아트 디렉터의 B급 취향의 산물로 웃어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분히 현실적인 건축가들이 작정하고 나서서 제안하는 대안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그것도 그리 수월한 방법은 아니다. 이 <돼지 도시>는 사람들이 돼지 농장을 떠올릴 때 지니게 되는 선입견을 무참하게 깨뜨린다. 만일 이들이 양돈 산업의 현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았다면, 기존의 시설을 개조하거나 그 외양을 감질 맛나게 환경 친화적인 모습으로 바꾸는데 그쳤을 것이다. 이들은 문제를 정의하는데 있어 기존의 상식적인 규범들로부터 멀리 도망간다.


이는 결과적으로 디자인이 상정해온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무참하게 짓밟아 놓는다. 돼지 도시의 인프라 구축에 드는 비용만 언뜻 가늠해 봐도 이 기획이 '비현실적'이라는 걸 눈치 채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이들의 제안이 지닌 '논리적' 현실성은 그런 경제적 비현실성을 훨씬 앞질러 나간다. 그들은 심지어 이 논리적 현실성에 집착한 나머지, 디자인의 합리적 상상력으로 치부되던 것, 그러니까 소위 심미적 합리성마저도 방기해 버린다. 이들은 모더니즘적 기능주의의 범주로 포섭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그런 집착의 결과로 최적화의 논리로 구축된 앙상한 구조물만이 남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구조물이다. 그 구조물은 모든 디자인의 미학적 관습과 의도적으로 단절한 채, 독특한 방법론의 경관을 펼쳐 보인다.


인간사의 관점에서 보면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 과도한 합리성을 투여하는 디자인, 돼지들의 복지 사회에 대한 청사진에는 다분히 초현실적인 아이러니가 넘실댄다. 사실 이 아이러니의 한 지류는 인간의 먹이감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사육 동물들의 역설에서 흘러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런 아이러니들은 우리가 자명하게 생각하는 합리성의 틀, 그리고 그 합리성으로 주조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한번쯤 다른 시선으로 재고해볼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둔다.


지금껏 살려본 네 가지 실험적인 디자인 사례는 착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상상력의 고공 점프를 행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디자인들이 실현되리라 생각하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디자인이 보여주는 도발적인 상상력은 디자인 문제에 대해 정형화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그 문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패러다임 전환의 교차로 위에 서 있는 디자이너들에게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한번 쯤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림 캡션:
<그림 1> 홍승표의 <가면 시민 X>
<그림 2-1> 제니 피네우스의 <코쿤체어>
<그림 2-2> 제니 피네우스의 <헤드코쿤>
<그림 3-1> <소셜 모바일>의 사용법 일러스트레이션. 위에서부터 소모1.<전기충격 모바일>, 소모2.<스피킹 모바일>. 소모3.<뮤지컬 모바일> 소모4.<녹킹Knocking 모바일> 소모5. <새총 모바일>
<그림 3-2> 소모 2. <스피킹 모바일>
<그림 3-3> 소모 3. <뮤지컬 모바일>
<그림 4-1> <스킨테틱>의 프리젠테이션을 위한 합성사진. 샤넬 브랜드를 상징하는 무늬를 피부에 이식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 4-2> <스킨테틱>의 패션쇼 시뮬레이션
<그림 5-1> <돼지 도시>의 전경
<그림 5-2> <돼지 도시>의 고층건물
<그림 5-3> <돼지 도시>의 자동화된 사육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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